In Pace
인도네시아 1965년 대학살 본문
나빌라
브래드포드 대학에서는 일 년에 한 번 International Day라는 행사가 열린다.
워낙 다양한 국가에서 학생들이 유학을 오다 보니 각자의 문화를 알리고 서로 배우는 기회를 가져보자는 목적인 듯했다.
학생들은 저마다 전통 의상을 차려입고 본인이 가지고 있던 혹은 공수해 온 공예품을 전시해 보여주거나 전통 음식을 만들어 와서 팔기도 했다.
천천히 둘러보는데 원형 모양의 예쁜 가죽 가방이 눈에 띄어 잠시 걸음을 멈췄다.
화려한 자수가 놓인 자주색 비단옷을 입고 매대 옆에 서 있던 여성이 한 번 매 보라고 가방을 들어 내게 건네주었다.
매 보니 예쁘긴 했지만 크기가 좀 커서 마치 북을 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떠냐고 물어보길래 느낀 바를 솔직히 말했더니 본인이 봐도 그래 보였는지 웃음을 터뜨렸다.
통성명을 하고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는데 우린 서로가 꽤 잘 통한다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나빌라'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여성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출신으로 MBA과정을 하고 있었지만 정치사회분야에도 관심이 많아 우린 가끔 만나 점심을 먹으면서 열띤 토론을 하곤 했다.
나빌라는 인도네시아가 반공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진정한 민주주의는 요원할 것 같다는 말을 자주 했다.
1965년 9월 30일 자정 무렵,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선 자칭 '9월 30일 운동'라 불리는 좌파 성향의 일부 군인들이 육군 장성 여섯 명과 장교 한 명을 자택에서 납치한 후 당시 대통령 수카르노를 우익 장성들의 쿠데타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고 발표한다. 하지만 그들의 무장 행동은 곧 역풍을 맞게 되는데 군 내부의 강경파이자 전략가였던 수하르토 소장이 재빠르게 군 지휘권을 장악해 9월 30일 운동 세력을 완전히 진압했기 때문이다.
수하르토 휘하의 군부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9월 30일 운동의 배후이며 정부 전복을 꾀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대적으로 공산당 지지자들을 말살하는 작전을 개시하는데 이로 인해 인도네시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참혹한 반공 숙청과 집단 학살이 자행된다. 대략 50만 명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될 정도로 광기의 폭력이었다.
1965 대학살을 집요하게 파해친 책, The Jakarta Method에서 저자 빈센트 베빈스(Vincent Bevins)는 그와 같은 비극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미국의 지원과 묵인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2017년에 해제된 자카르타 주재 미국 대사관의 기밀문서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약진을 냉전 질서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느꼈던 미국과 서방 진영이 인도네시아 군부를 반공 전선의 전위로 만들기 위해 자금과 훈련을 지원하는 한편 수하르토 군부의 반공 작전을 방조하고 묵인한 정황이 담겨 있다.
미국의 지지에 힘입어 1967년 대통령에 오른 수하르토는 소위 신질서(New Order)를 구축했고,1965 대학살에 대한 진실은 봉인된 채 오로지 '공산주의자들의 정권 전복 시도'로만 서술되었다. 공산주의자 또는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체포됐고, 단지 PKI 출신과 대화를 했다는 이유로 수용소로 끌려가거나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공산주의는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금기와 낙인의 상징이자 사회적 매장의 이유가 됐다.
아시아 금융 위기 속에서 수하르토가 퇴진하고 그 후로 15년이 지났지만 반공은 형태를 바꾸어 정치적 도구로 반복 소환되며 여전히 인도네시아 사회의 갈등과 혐오를 부추기는 데 이용되고 있다. 수년 동안 정부의 강력한 선전으로 길러진 반공 정서는 말 그대로 사회 전반에 뿌리 깊게 고착된 상태이다. 이를 두고 캘리포니아 주립대 마이클 밴 교수는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죽은 독재자의 냉전 반공주의 속에 갇혀 있다”고 진단했다. 대한민국도 여전히 멸공을 외치고 있는 걸 보면 공산주의의 망령은 아시아에서 쉬이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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