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Pace
모로코 군주제의 폐해 본문
에메랄드 눈동자의 아이샤
영국 브래드포드 대학 1층에 마련되어 있던 국제학생을 위한 사무실에는 아이샤라는 아리따운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그녀를 처음 봤을 때 마치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명화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를 실제로 보는 느낌이었다.
심리학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아이샤는 이름만 들어봤던 모로코 출신이었다.
백인보다 더 흰 살결에 프랑스어를 능숙하게 구사해서 의아했는데 모로코가 한 때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다는 사실을 알고는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무슬림이었던 아이샤는 언제나 차분한 색상의 히잡(머릿수건)을 쓰고 다녔다.
누가 봐도 백인 같은 외모에 히잡을 착용하고 있으니 늘 사람들의 시선에 시달려야 했지만 본인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히잡을 고수할 만큼 아이샤는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아이샤를 알고 지낸 지 1년쯤 되었을 때 민주화 혁명이 아랍 지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튀니지에서 촉발된 민주화 시위는 이집트, 시리아, 모로코, 리비아, 예맨 등으로 이어져 철옹성 같던 독재 정권들을 대거에 무너뜨리는 이변을 낳았다.
역사적으로 이례적인 규모의 시위였던 데다 삽시간에 혁명의 불길이 번져간 까닭에 조직화된 시위가 아니었음에도 수십 년 동안 군림했던 독재정권들이 미처 손을 쓸 시간조차 없이 와해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혁명의 화염 속에서도 몇몇 독재 정권들이 살아남았는데 그중 하나가 모로코였다.
아이샤는 '알라의 은혜'라고 고백했지만.. 모로코를 여전히 사회적, 경제적 위기 속에서 헤매게 하고 있는 군주제의 존속이 진정 알라의 은혜인지 의구심이 든다.
2011년, 모로코의 국왕, 모하메드 6세는 개혁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선 시민들을 달래기 위해 권력 분산을 약속했지만 국왕 중심의 권력 구조는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이 때문에 개혁을 방해하고 있는 일등 공신이 왕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왕실 자체가 알 마다(Al Mada) 그룹이라는 대규모 기업 집단을 통해 다양한 사업을 장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마크젠(Makhzen)이라는 국왕의 친위 네트워크(왕족, 고위 관료, 대기업가 등)가 국가 재산, 대형 사업 계약, 공공 토지 거래를 독점하면서 부패가 자연스럽게 구조화된 상황이라 할 수 있다.
덕분에 현재 모로코는 그야말로 경제 위기 종합세트이다.
식료품 가격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면서 인플레이션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는데 공공부채는 GDP 대비 70%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있다.
특히 청년 실업률이 40%를 육박하고 있는 바람에 일자리를 찾아 나라를 떠나는 청년들이 늘고 있고, 일자리가 창출되지 않다 보니 지하 경제(informal labor market)만 나날이 팽창하고 있다.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올라오는 난민들을 막아주는 완충지대가 되고 있는 까닭에 유럽 연합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있지만 위기를 해소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액수인 데다 돈만으론 결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카사블랑카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답은 2011년부터 지속적으로 모로코 시민들이 거리에 나와 외치는 구호에 이미 나와있다.
국왕이 정치권력을 의회에 이양하고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실질적인 입헌군주제로 전환하는 것
그리고 국왕이 독점하고 있는 경제 권력의 해체를 위해 기업 간의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고 독점이나 불공정 거래 등을 규제하는 정부 기관의 독립적인 운영이 바로 그것이다.
부디 모로코 시민들이 개혁을 위한 첫 걸음을 뗄 수 있도록 알라의 진정한 은혜가 함께 하길.. Allāh yakūn maʿ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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