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Pace
파키스탄 신성모독법 본문
너의 이름은 아닐라
아침 일찍부터 준비해서 학교 정문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으로 총총 걸어갔다.
브래드포드에서 기차로 20분 거리에 리즈라는 예쁜 도시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첫 주말을 맞아 구경을 갈 참이었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이라 주말이었는데도 거리는 한산했다.
늦여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영국의 스산한 날씨 때문에 옷깃을 여미게 되는 아침이었다.
근데 한참을 기다려도 기차역까지 가는 버스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 주말에는 버스가 다니질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 초조해질 때 즈음 보랏빛 실크 사리(전통의상)를 곱게 차려입은, 얼굴은 더 고운 여성이 정류장 쪽으로 걸어오더니 내 옆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반가운 마음에 "기차역에 가는 버스를 한참 기다렸는데 혹시 언제 오는지 아나요?"라고 묻자 여성은 "곧 올 거예요"라며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성의 말대로 1~2분 후에 버스가 도착했고 우린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여성은 생의학을 전공하는 학부생이었고 부모님과 함께 13살 때 파키스탄에서 이민을 왔다고 했다.
본인은 파키스탄을 무척 사랑하지만 크리스천으로서 살아가기엔 차별과 핍박이 너무 심하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제야 여성이 무슬림 여성들이 흔히 착용하는 히잡(머릿수건)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게 눈에 들어왔다.
기차역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헤어져야 했는데 하차할 때가 돼서야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버스에서 내리면서 급하게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그러자 여성이 소리쳤다. "아닐라!"
아닐라가 보여준 그 짧은 순간의 상냥함이 꽤 인상이 깊었던지 그녀와 다시 마주치길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영국에 머무는 동안 아닐라를 다시 만나진 못했다.
차별을 피해 조국 파키스탄을 떠나왔던 아닐라와 그녀의 가족 모두가 부디 영국에선 안녕하길 바랄 뿐이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는 blasphemy law라 불리는 신성모독법이 존재한다.
성스러운 존재나 상징을 모독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법이라 할 수 있는데 파키스탄은 이란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엄격한 신성모독법을 가진 국가이다. 이로 인해 지난 30년 동안 수 천명의 파키스탄인들이 신성모독 혐의로 기소됐고, 1990년 이후 이슬람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80명 이상이 군중이나 자경단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실 파키스탄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인도와 분리되기 전까지만 해도 종교·문화적 다양성이 공존하던 사회였다. 하지만 독립 이후 이슬람교가 국가 정체성의 핵심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파키스탄 정부와 종교 세력 간의 동맹이 형성된다.
특히 1977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지아 울 하크(Zia-ul-Haq) 장군은 자신을 '이슬람 질서의 수호하는 자'라는 정체성을 내세워 군사 정권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다. 본질적으로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의도였지만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사이의 패권 전쟁, 인도와의 카슈미르 분쟁이라는 지정학적 요구에 부응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다.
그의 독재 아래 파키스탄의 이슬람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그 일환으로 신성모독법이 강화되면서 이슬람 경전인 꾸란을 훼손하거나 이슬람의 예언자와 후손을 모독하는 행위 등이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었다.
문제는 신성모독법 조항들의 표현이 모호하고 광범위해 실제로는 종교적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기독교와 같은 소수 종파에게 자의적 혐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렇다 보니 기독교나 힌두교 신자들은 사회경제적 차별을 넘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에 의한 유혈 공격에까지 지속적으로 노출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서 파키스탄 소수 종파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중단되기 위해선 이슬람교를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하는 파키스탄 정부의 행태가 지양되어야 하겠지만 보다 현실적으로 국제사회가 우선적으로 요구해 볼 수 있는 조치는 신성모독법의 개정이 아닐까 싶다.
'국제 이슈 콕콕'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시즘과 극우 포퓰리즘 (1) | 2025.05.15 |
---|---|
공정무역 초콜릿 (0) | 2025.05.03 |
인도네시아 1965년 대학살 (0) | 2025.05.02 |
방글라데시 7월 혁명 (0) | 2025.05.01 |
모로코 군주제의 폐해 (0) | 2025.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