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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민주시민교육

水晶 2025. 4. 23. 05:33

정의의 사자, 한스

 

독일에서 온 한스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나와 평화학과 친구들은 도서관 입구에 놓여있는 작은 테이블 근처로 모였다.

생일 축하는 평화학과에서 의례 있는 일이었지만 '찐' 평화주의자인 한스에 대한 학우들의 애정은 각별했다.

한스가 나타나자 우리는 목청껏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고 함박미소를 짓고 있던 한스는 노래가 끝나자 케이크에 꼽혀있던 촛불 위로 숨을 크게 불었다.

네덜란드 출신의 노라가 케이크를 잘라보겠다고 나섰다.

20명이 넘게 모여있던 까닭에 노라는 그리 크지 않은 케이크를 잘게 여러 조각으로 썰어야 했다. 플라스틱 칼이 케이크를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부스러기가 우수수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한스가 옆에서 부지런히 오른손으로 부스러기를 쓸어 모으더니 테이블 가까이 대고 있던 왼손 위로 깨끗하게 쓸어 담았다.

그저 테이블을 치우려는 줄 알았던 난 눈이 동그래졌다. 한스가 부스러기를 모은 왼손을 입으로 가져가는 게 아닌가! 

"안돼, 한스!!"

"왜, 미리암?"

"사람들이 발을 올려놨던 테이블이잖아..."

"난 상관없는데.. 흐흐"

 

한스는 그렇게 수더분한, 세상을 유영하듯 살아가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지만 사회적 불의에 대해선 무척이나 단호했다.

한스는 종종 군축과 종전을 요구하는 시위를 기획해서 친구들의 동참을 부탁하곤 했는데 연극배우를 했던 경력을 십분 살려 시위 중에 마임 퍼포먼스를 펼치거나 친구들과 짧은 공연을 준비해 메시지를 전했다. 

한스와의 의리로 학생회관 로비 바닥에 누워 시체 역할을 했던 그날의 추억이 지금까지도 나를 미소 짓게 한다.


 

한스가 그토록 정의로운 사람일 수 있던 이유는 타고난 성품이나 부모님의 양육방식의 영향도 있겠지만 나는 한스가 받았다는 독일의 민주시민교육이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든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 정권의 반인륜적 범죄와 전체주의적 통치와 같은 비극이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초중고 교과과정에 시민교육을 의무화했는데 주마다 명칭은 다르지만 모두 성숙한 민주시민을 양성하는데 그 목표를 두고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BPB(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라고 불리는 연방정치교육원이 존재한다. 내무부 소속이지만 법령으로 독립이 보장된 기구로 다양한 연령층과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특화된 시민교육 자료와 연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16개 주 정부 '정치교육원'과 협력해 학교의 민주시민교육을 지원하고 있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학생들이 학교 밖 정치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한다는 것이다.

 

덕분에 독일에는 대대적인 학생 시위들이 목격돼 왔다.

2009년 6월, 독일 전역에서 만 명이 넘는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독일 교육의 개혁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아랍혁명으로 유럽의 난민 사태가 고조되던 2015년, 학생들은 난민들이 받고 있는 차별에 대해 독일 정부가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며 보다 적극적인 난민 대책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2019년 3월, 다시 한번 독일의 학생 시위가 외신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는데, 초중고 할 것 없이 수천 명의 학생들이 학교에서 뛰쳐나와 'Fridays for Future'을 외치며 기후 위기에 대한 정부의 강력한 정책을 촉구했다.

 

물론 정부로부터 의미 있는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한 경우도 있었지만 학생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함이 없도록 학교나 사회로부터 격려와 지원을 받는 환경은 학생들이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내면화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시민으로 성장하는데 중요한 토대가 됐을 것이다. 이는 극우정당이 부상하는 가운데에도 독일의 민주주의가 쉽사리 흔들리거나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기반이자 앞으로도 민주사회를 지탱해 나갈 핵심 동력이 될 거라 의심치 않는다.

 

기후 위기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한 독일 청소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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