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국제 이슈 콕콕 (38)
In Pace

나이지리아 출신 누라(Nura)는 대학원 필수과목인 통계 수업에서 만났다.앳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20대 초반에 결혼해서 이미 딸이 두 명이나 있는 아빠였다.학과가 달라 통계 수업 이후 수업에서 볼 일은 없었지만 태국 친구 팡과 절친이었던 까닭에 나와도 자연스럽게 자주 보는 사이가 되면서 우리끼린 세 자매라는 표현을 썼다 ㅎ그 당시 나이지리아 여학생들이 인질로 잡혀가는 사건이 터지면서 #Bring Back Our Girls 운동이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던 참이라 누라에게 보코하람에 대해 물어봤던 기억이 있다.누라의 말에 의하면 보코하람은 그야말로 오합지졸로 나이지리아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수일 안에 소탕이 가능한 집단이라고 했다.다만 나이지리아 정부가 의도적으로 보코하람을 퇴치하지 않고 있다는 것...

국왕의 팬, Fang20대 중반이었는데도 '팡'은 고등학생처럼 어려 보였다.본명은 티안팁이었지만 별명인 '팡'으로 불러달라고 했다.중국계 태국인이어서 외모는 태국인보다는 중국인에 가까웠는데 갸름한 달걀형 얼굴에 단아한 이목구비를 가진 친구였다.얼마나 명석한지 대학은 태국 명문대에서 전액 장학금으로 마친 데다 석사과정은 정부 장학생으로 스위스에서 했고 박사과정은 태국의 임용된 대학에서 '교원 역량 증진' 차원에서 해마다 한 명씩 선발해 박사학위 과정을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에 뽑혀 유학을 온 거였다.이쯤 되면 도도한 아가씨가 상상되겠지만 도도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소탈하기 그지없는 친구였다.거기다 얼마나 효녀인지 태국 대학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를 알뜰하게 모아서 한 달에 한 번 부모님께 송금을 했다. ..

곰돌이 푸, 무스타파 기숙사 7층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A호실에서 나오는 거대한 몸집의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머리까지 민둥머리여서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는 외모였지만 인상이 너무 온화하고 푸근한 바람에 오히려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멋쩍게 웃으며 'Hi'라고 인사를 건네자 남학생은 활짝 웃으며 'Hey'라고 받아쳤다.통성명을 하고 난 후 남학생이 저음의 나긋한 목소리로 물어왔다."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디서 왔는지 물어도 되니?" "South Korea. 너는?""난 레바논 사람이야""레바논.. 이름은 들어봤는데..""유럽에 사는 사람들에겐 최고의 휴양지이지""그렇구나. 근데, 넌 전공이 뭐니?""평화학. 너는?""진짜? 나도야. 무슨 과정? 난 박사과정으로 왔어.""오, 굉장히 어..

독실한 무슬림 모하메드평화학과에는 아프리카 나라에서 유학을 온 학우들이 꽤 많았다.대다수가 자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온 공무원들이었는데 그래서 그랬는지 대부분 40대 후반의 중년 아저씨들이었다.그중에 수단에서 온 모하메드 알다고라는 아저씨는 군인이었는데 푸근한 인상만큼이나 인품도 훌륭했다.대학원생 중에 가장 연장자였지만 어린 학우들에게 늘 먼저 다가가 안부를 묻고 누구든 깍듯하게 대했다.독실한 무슬림이었던 모하메드는 시계가 오후 4시 45분을 가리키면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학교 근처에 있는 모스크(이슬람 사원)로 향했다. 모하메드에게 기도 시간은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는 우선순위였다.모하메드를 만나기 전까진 딱히 이슬람교에 대해 아는 바도 없이 선입견만 가지고 있었다면 모하메드를 알게 된 후로는 알라를 믿..

쿠르드족의 독립을 꿈꾸는 뮤게공강 시간에 사람이 많은 카페테리아는 가기 싫어서 빈 교실에 들어가 집에서 만들어 온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한 여학생이 문을 빼꼼 열고 들어왔다.진밤색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길게 풀어헤치고 가죽 재킷을 걸친 여학생은 동서양의 미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목구비에 키까지 커서 무척이나 세련된 느낌이 났다.그녀는 조용히 공강 시간을 때울 장소를 물색 중이라고 하면서 함께 있어도 괜찮겠냐고 물었다."물론"이라고 답하자 그녀는 성큼성큼 걸어와 내 앞자리의 의자를 빼더니 나를 보고 뒤돌아 앉았다. 그녀의 이름은 뮤게 일드림. 터키에서 왔다고 했다.나는 뮤게에게 샌드위치 한 조각을 건넸다. 뮤게는 아침도 먹지 못해 배고팠는데 고맙다며 사랑스러운 미소와 함께 건네받았다.우린 서로 왜 브래..

플랫메이트 '타야베'브래드포드 대학이 직접 운영/관리하는 기숙사가 있긴 했지만 가격이 너무 비쌌다. 학교 근처에 위치한 민간 기숙사 중에서 가장 깨끗해 보이는 Arkwright과 계약을 하고 짐을 옮겼다.우리나라 고시텔과 비슷한 구조로 크기도 싱글 침대 하나와 책상 하나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은 공간이었지만 가난한 유학생에겐 최선의 선택이었다.좁고 갑갑했던 기숙사에서 그래도 즐거운 추억을 만들 수 있던 이유는 이란에서 온 플랫메이트 타야베 덕분이었다.신비로운 초록색 눈동자에 옅은 금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타야베는 마음까지 비단 같은 아가씨였다.만난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따끈한 쌀밥이 먹고 싶지만 아직 밥솥이 없어서 못해 먹고 있다는 내 말에 냄비 밥을 지어 생선을 얹은 덮밥을 뚝딱 만들어주었다...

아흘람의 소망난 우선 그녀의 나이에 놀랐다.적어도 30대 후반으로 보였던 아흘람은 27살이었다.아랍계 특유의 아름다운 곡선이 살아있는 얼굴이었지만 몸의 어딘가에서 보내오는 통증으로 표정은 늘 일그러져있었다.아흘람은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는 독일 NGO 단체의 도움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올 수 있었다고 했다.영국에 오기 전까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마련된 난민촌에서 생활했다던 아흘람은 영국 남자를 만나 교제하고 싶어 했는데 궁극적으로는 영국 남자와 결혼해 시민권을 얻어 팔레스타인에 있는 가족들을 영국으로 초청해 함께 사는 게 소망이라고 했다.듣기에 다소 민망한 소망을 거침없이 말하는 그녀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하지만 그녀가 들려주는 난민촌의 이야기는 그녀가 왜 그토록 영국 남자와 결혼을 갈망하는지 충..

친절왕 "샤"런던에서 브래드포드까지 오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두 개나 되는 캐리어가 그 이유 중 하나였다. 학교에 도착 신고를 하고 난 후 또다시 내 몸만한 캐리어를 끌고 미리 예약해 둔 숙소로 가고 있는데 약간의 언덕길에서 캐리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몸이 뒤로 밀렸다."어어.." 하면서 캐리어가 이끄는 대로 미끄러지던 찰나 다부진 체격의 남학생이 달려와 캐리어를 잡아준 덕에 나의 뒷걸음질은 다행히 거기서 멈췄다.연거푸 땡큐를 외친 후 캐리어를 건네받으려 하자 남학생은 캐리어의 손잡이를 꽉 잡은 채 숙소가 어디냐며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웬만하면 사양했을 테지만 런던에서부터 낑낑대고 오느라 이미 힘이 다 빠졌던 나는 남학생의 친절을 거절하지 않았다.찾아간 숙소는 아담한 가정집이었는데 주인아저씨께선 내게..

2023년 11월, 유네스코에서 국가들은 '평화, 인권, 국제이해, 협력, 기본적 자유, 세계시민성,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교육 권고'를 채택한다. '평화, 인권, 지속가능발전을 위한 교육 권고'로 짧게 지칭되는 이 권고는 약 50년 전, 국가들이 교육을 평화와 국제 이해의 핵심 동력으로 삼고 협력해 나갈 것을 약속한 '1974 권고'를 업데이트한 것이다. 이 권고에서 교육은 모든 사람들이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의 인격, 존엄성, 재능 및 정신적, 신체적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는 과정으로 양도 불가능한 인권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인류가 전쟁과 폭력, 환경과 생물 다양성의 파괴, 불평등의 증가, 혐오 이념의 확산 등 전지구적 도전에 직면해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지구 공동체를 만들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