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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Pace
사건은 은모 교수의 통계수업에서 발생했다.국제기구의 문을 두드려 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국제대학원에 입학했던 당시 나는 스물여덟이었다.수업 중에 어떤 내용에서 파생됐는지 기억은 없지만 교수가 여학생들만 골라서 나이를 물었다.내 차례가 됐을 때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나이를 밝혔고 교수의 코멘트는 과히 충격적이었다. "목매달이네. 여자 나이 스물다섯 이하면 금메달, 스물여섯이면 은메달, 스물일곱이면 동메달, 스물여덟 이상이면 목매달. 껄껄껄.." 내 볼 양쪽에 붙어있는 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웃으며 받아 칠 여유도 없었지만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당시 난 은교수의 농담이 모욕적이라는 생각만 했지 젠더 차별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고 특히나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다는 ..
이른 저녁을 먹고 난 후 나 스스로에게 주는 휴식 시간 동안 난 드라마를 시청한다.보통 인기 드라마 하이라이트를 시청하는데 최근에 너튜브 알고리즘으로 '취하는 로맨스'라는 드라마를 보게 됐다. 로맨스의 전개는 여느 다른 드라마들과 별 다르지 않았는데 (특히 여주인공이 좀 아쉽다. 설인아가 했으면 어땠을까?) 딱 한 가지 내 마음을 훔친 설정이 있다면 남자 주인공 윤민주의 캐릭터였다. 맥주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윤민주는 큰 소리에 두통이 생기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식은땀이 나고, 상대의 감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초초초민감자. 오호~ 이제 드라마에도 초민감성을 가진 캐릭터가 등장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했는데 1화 하이라이트에서 윤민주가 스스로를 정의하는 단어가 생소했다."엠패스요! 번역하면 초민감자."..
박사과정 시절 운 좋게 일본 외무성 국제문제연구소 장학생으로 뽑혀 3개월 동안 방문연구원으로 일본에 머문 적이 있는데 내 인생의 황금기라 여겨질 정도로 행복했다 (심지어 박사논문 감사의 글에도 그렇게 적었다).다른 것보다 일본인들의 개인주의 문화가 뭐든 혼자 하는 게 편한 나랑 찰떡같이 잘 맞았다.특히 서로 간에 깍듯하게 예의를 지켜주는 문화 덕분에 실로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도가 거의 0에 수렴했던 시절이었다. 다만 조금 의아하게 여겨졌던 부분이 하나 있었는데..당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지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대한민국 정부가 일본산 식품 수입을 전면 금지하는 바람에 WTO에 제소까지 되던 시절이었는데 웬일인지 일본 마켓에서는 후쿠시마산 농산물이 버젓이 팔리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안녕하세요, 브런치카페 수정입니다.어제가 음력 절기로 입동이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런지 아침 기온이 갑자기 뚝 떨어졌습니다.이런 아침엔 따뜻한 코코아 한 잔 타놓고 힐링 소설을 읽어줘야 제맛이죠 ㅎ어제 저는 힐링, 플러스 추리가 오묘하게 버무려진 소설을 만났는데 후반부에 가서 눈물 콧물을 쏙 뺐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라는 일본 작가의 '녹나무의 여신'이라는 작품인데 몇 년 전에 출판된 '녹나무의 파수꾼'이라는 작품의 속편인 듯했어요.녹나무라는 나무를 처음 들어봐서 찾아보니 식혜나 수정과에 넣는 계피과 나무라고 하더라고요. 어린 줄기가 성장할 때까지 연한 녹색을 띠기 때문에 녹나무라는 이름이 붙여진 거라고 합니다. 소설 속에 나오는 녹나무에는 신묘한 능력이 있는데 그건 바로 녹나무 기둥에 들어가서 떠..
미국 시민들은 역시 트럼프를 선택했다. 그래도 미국 언론의 예상처럼 박빙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완승을 거둘 줄이야.. 사실 가장 아연실색한 집단은 미국의 엘리트들이다. 미국 시민들이 또다시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에 대해 개탄하는 걸 보면 미국 엘리트 집단은 여전히 자국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시민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꿈꾸게 하고 싶었다면 바이든 정부는 경제적 불평등을 먼저 해소했어야 했다.민주당에게 기회를 줬지만 제대로 서민들의 상대적 빈곤을 개선시키지 못했으니 누굴 탓하랴.. 우크라이나와 가자지구의 엇갈릴 운명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우크라이나 전쟁이 어떻게든 마무리가 되지 않을까 싶은 점이다.우선 트럼프는 푸틴을 딱히 싫어하지 않..
성격이 꽤나 급한 데다 지난 수년 동안 속독하는 습관이 배어버린 바람에 성경도 차분히 한 자 한 자 꼭꼭 씹어가며 읽지 못하는 나를 종종 발견한다.그래서 필사를 결심했다. 이왕이면 내 글씨체도 다시 찾고 싶었다.손글씨를 쓸 일이 없다 보니 가끔 메모할 때 글씨체가 무너지고 있는 게 보였다. 혹시 글씨 연습도 하면서 성경 필사도 할 수 있는 책이 있을까 싶어 인터넷 서점을 뒤졌더니 어린이 성경 필사 책이 있긴 있었다. 문제는 새번역 성경이 아니었다 (내게 다른 한국어 번역본은 너무 어렵다). 종이도 있겠다, 프린터도 있겠다, 내가 만들어야겠다 싶어 직접 제작했다 ㅎ폰트는 원래 내 글씨체와 가장 흡사한 문체부 바탕체를 선택했고 투명도는 40%로 설정했다. 처음엔 문체부 바탕체 폰트 사이즈 16으로 인쇄했는데..
온라인 북클럽에 올라온 신간 중에 '초가공 식품'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썩지 않는 식빵에 대한 경고는 꽤 여러 번 접했지만 녹지 않는 아이스크림에 대한 경고가 신선해서 읽기 시작했는데.. 눈을 감고도 빙그레 투게더와 롯데 프라임, 나뚜루 바닐라의 맛을 구별할 만큼 아이스크림 마니아인 나는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원서를 검색했다.오.. 타이틀이 훨씬 원색적이다.Ultra-processed people (초가공된 사람들).너무 많은 가공을 거쳐 음식이라 할 수 없는 음식을 먹고사는 우리를 일컫는 말이리라. 저자는 크리스 반 툴레켄 (Chris van Tulleken)영국 출신의 의사이자 저널리스트이다.우리는 왜 음식도 아닌 것을 먹고 있는지. 그리고 왜 먹는 걸 멈출 수 없는지 열과 성을 다해 사람들에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 일을 하더라도 수고스러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굳이 일을 해야 한다면 그나마 내가 좋아하고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맞지 않나 싶었다.스티브 잡스의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당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라는 말이 진리처럼 여겨지는 시대 아닌가.다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아래 기사를 읽고 꺼림칙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Do What You Love, or Do What Needs Doing?Bethany Jenkins explores the dichotomy between doing what you love and doing what needs to be done.www.thegos..
누구를 위한 혁신인가온라인 북클럽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대런 아세모글루와 사이먼 존슨의 "권력과 진보"라는 책이 올라왔길래 단숨에 읽었다.요지는 기술의 진보(혁신)가 언제나 모두의 삶을 개선시키고 풍요롭게 하지 않았다는 것오히려 많은 노동자들의 삶을 열악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았고 우리가 새롭게 맞이하고 있는 AI 혁명에서 동일한 절차를 밟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저자들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굵직한 기술의 진보와 소득불평등 간의 관계가 어떤 양상을 보여왔는지 설명하길래 그래프를 찾아봤다 (난 한눈에 들어오는 도표가 좋다). 저자들의 말대로 2차 세계대전(WWII) 이후 경제선진국들의 소득불평등이 획기적으로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3차 산업혁명으로 자동화가 급속도..